鍾 路 洋 服 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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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의 역사

      양복의 도입:

 우리나라 양복사(洋服史)에서는 양복의 시작을 우리땅에 서양인의 상륙이나 양복입은 사람들과의 교류시점 보다는 나라에서 제도로 허용한 1895년을(고종32년 11월15일 조칙으로 의복제도 공인)양복의 시작이라고 정의한다. 당시 양복이 공인되었으나 문화적인 반발은 무척 거세었다. 1900년 4월에는 칙령 14호와 15호로 문관 복장규칙과 문관 대례복제를 정하여 구미식 관복으로 바뀌었다. 이때 반포된 문관복은 영국의 궁중예복을 모방한 일본의 대례복을 참작하였으며 소례복으로는 연미복과 프록코트를 입었다. 1900년초에 조선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이 서울, 평양, 부산 등 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양복의 보급:

1919년 삼일운동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일대 전기가 되었다. 양복이 많이 보급되므로써 양복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늘었고 서울 등 대도시에서 양복양성소가 성황을 이루었다. 1930년대 일본의 압제밑에서도 양복업계는 규모가 커졌으며 이런 현상은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지속되었다.

      암흑시대:

1930년대 후반부터 몰아닥친 격심한 불경기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우리나라의 상황은 매우어려운 모습이었다. 양복업계도 배급제가 시행되며 대부분 영세한 양복업계가 혜택을 받지못하고 수선방으로 전락하여 방황하게 되었다. 평화산업인 양복점의 활기는 기대할 수도없었다. 1945년8월15일은 양복계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사람 밑에서 고생하던 양복인들은 일인 양복점을 이어받거나 개업하는 등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전쟁과 시련:

한국전쟁은 복장사에 있어도 일대 전기가 되었다. 전시에 군복의 활용은 자연스러운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군복을 탈색하거나 고쳐입었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경제인 등 사회의 엘리트계층은 그래도 신사복을 입었으며 또 하나의 패션현상으로 해외구호품으로 들어온 의류이다. 그러나 옷이 너무커서 그대로 입을 수가없고 고쳐서 입었다. 당시 많은 피난 양복인들이 부산에모여 군복의 수선과 구호품을줄여주면서 생존한 어려운 시대가 있었다. 한국전쟁은 양복사에서의 암흑기였으나 이 시기야말로 그후 펼쳐지는 전성기의 토대가 되었다.

       전성시대:

1950년대 중반부터 일기시작한 전후 양복수요의 증가는 가히 폭발적이라할 수있으며 서울, 부산 등 대도시는 물론 지방 읍단위의 작은 도시에도 중심가에는 당연히 양복점이 들어섰다. 또 이시기에 국내 양복지가 생산되며 양복점도 우후죽순 생겨나게되었다. 양복의 전성기에 걸맞게 양복기술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1967년7월 스페인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양복직종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양복직종에서만 내리 1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여 국내양복기술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되었으며 국내에서는 기술의 평준화가 이루어졌다.

       변화와 도전:

1970년대로 접어들며 양복업계는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게되어 구조적인 불황에 빠지게되며 양복지 생산업계도 경영의압박이 가중되었다. 1980년대에는 대기업에서 대규모로 공장 기성복을 생산하게되면서 양복업계에 큰 충격을 주게되었다. 정치적으로도 격동기를 거치며 긴축정책의 여파로 양복업계의 경기침체가 있었지만 수출의 증가와 물가안정으로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현상유지를 하고있었으나 기성복의 보급과 유행으로 맞춤양복업계가 다시 침체기를 맞고있으나 맞춤양복의 참된 가치를 재발견하고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변화와 도전정신이 요구되고 있다.

 자료출처: (사)한국남성패션문화협회